*소설 렘브란트의 유령을 읽고선 렘브란트라는 화가가 궁금해 검색해 보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렘브란트를 빛의 화가라고 말했다. 그의 그림들에 비친 빛과 음영이 얼마나 세밀한지 말해주는 대목이다..
네덜란드 화가·판화가. 제분업자(製粉業者)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라틴어학교를 거쳐 1620년 레이덴대학에 들어갔으나 화가가 될 것을 결심, 곧 퇴학하고 J. 스와넨부르흐와 암스테르담에 있는 P. 라스트만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라스트만은 이탈리아로부터 카라바조 및 엘스하이머의 영향을 네덜란드에 도입한 일련의 이야기 화가들, 이른바 <렘브란트 전파(前派;Pre-Rembrandtists)>의 대표자로, 구약성서에서 작품의 소재를 취하여 전세대의 기교파와는 대조적으로 우의성(寓意性)을 배제하고 이야기의 명쾌한 서술을 지향한 그의 회화는 렘브란트에게 영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1625년 무렵부터 레이덴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친구 J. 리벤스와 경쟁하며 강한 명암대비와 정교한 자연주의적 세부묘사를 한 이야기 그림을 그렸다.
1631년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그 곳에 정착했다. 암스테르담 외과의사회의 위촉으로 그린 《털프 박사의 해부학강의(1632)》로 크게 호평을 받아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그는 수많은 초상화를 계속 그리는 한편 레이덴시대의 친구인 문인정치가 C. 호이겐스의 추천으로 네덜란드 총독 프레드릭 헨드릭을 위해 《그리스도의 수난》 연작(連作)을 제작했다. 1634년 프리슬란트의 명문 출신 사스키아 반 오이렌부르흐와 결혼하고 화가조합에 가입, 이어서 1639년에는 시내에 저택을 구입했다. G. 플링크·F. 볼 등 많은 제자를 양성한 이 시기의 작품에는 《아브라함의 희생》 《눈을 찌푸린 샘슨》 등 극적 순간의 격렬한 움직임과 얼마쯤 과장된 몸짓과 표정에 의한 감정의 표출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이 작품들은 렘브란트가 이탈리아 유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P.P. 루벤스를 필두로 하는 당시의 국제적인 바로크 조류(潮流)에 아주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Rembrandt Christ In The Storm On The Sea Of Galilee
사실적인 네덜란드 풍경화 속에서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는 일련의 독특하고 환상적인 풍경화 제작과 한평생의 취미였던 미술품·골동품 및 타국의 무구(武具)·의상 등 대규모 수집도 이 무렵에 시작되었다. 이 10년 동안이 그의 명성과 생활의 절정기였다. 그러나 그의 회화가 성숙해짐에 따라 당시 일반이 좋아하던 평판(平版)의 초상화 등에 만족하지 못해 외면적으로 정확한 묘사보다는 오히려 내면적인 것과, 깊은 인간성을 중요시해서 종교적 또는 신화적인 제재(題材)나 자화상이 많아졌다.
그의 대표적인 명작 《야경(1642)》을 고비로 갑자기 세계적인 명성에서 멀어져갔다. 이 작품에서 그는 당시의 유행인 기념촬영적인 단체 초상화에서 벗어나 그의 독특한 명암의 효과에 의한 대담한 극적 구성을 사용했으나 일반인은 그 예술성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해 아내와도 사별하고 실망과 곤궁에 빠졌으나, 그의 위대한 예술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그 이후부터였다. 그는 파산선고를 받고, 둘째 부인 헨드리케와 자식 티투스마저 죽은 뒤 아무도 돌보는 사람 없이 유대인 지역의 초라한 집에서 죽었으나, 죽은 지 100년도 지나지 않아 그의 위대한 예술성이 입증되었다.
The Night Watch
그의 예술은 시대를 초월한 것이었으며,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와 유럽 회화를 대표하는 최대의 화가였다. 종교·신화·초상·풍경·풍속·정물 등 다방면에 걸친 그의 작품은 현존되고 있는 것만도 약 600점의 회화, 300여 점의 에칭과 수천 점의 소묘가 있다. 높은 종교적 정감과, 인간심리의 움직임이 깊이 있게 표현된 그의 작품에는 따뜻한 애정이 스며 있다.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 (1632년) - 마우리스하위츠, 헤이그
작품으로 《사스키아 반 오이렌부르흐의 초상》 《헨드리케 스토펠스의 초상》 《엠마오의 그리스도》 《야곱의 축복》 《유대인 신부》 《성가족(聖家族)》 《다에나》 《병자(病者)를 고치는 그리스도》 《3그루의 나무》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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